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항 수심원 사건 (문단 편집) == 사후처리, 생존자의 행방 == 일단 원생들을 탈출시키기는 했는데 당시 동행했던 이 변호사와 김 정신과 의사가 의논한 바에 따르면 이유 없이 갇힌 사람들만이라도 즉각 석방하는 것까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재사회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믿었던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수심원과 비슷한 케이스였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형제복지원]] 피해자들도 재사회화의 어려움과 [[PTSD]]로 고충을 겪었으나 적어도 자신을 찾아 주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 살아가고 국가 보상 투쟁에 나섰던 걸 봐도 알 수 있다.] 탈출한 이들은 임시 거류지에 있다가 그 중 몇몇은 다시 충청도 등의 여러 지역에 위치한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에 분산 인계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거기에 제대로 인계되지 못하거나 오래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쉼터 등을 전전하다가 대다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자살, 사망, 병사, 고독사,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하 [[그것이 알고싶다]] 2016년 방영분에 보도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름 뒤의 †표시는 사망한 원생들.) * 철장틈으로 탈출한 신모씨† - 수용 기간 8년. 형제/가족들과 싸우다 알코올 중독자라는 이유로 수용된 것으로 추정. 딸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탈출한 사람이다. 2016년에 그가 살던 동네는 많이 바뀌었는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36년간 토박이었다는 이발사조차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다 간신히 그의 행적을 확인한 곳이 교회 쉼터였으며 그 쉼터에는 2002년에 반 년간 있었다가 무단 퇴소를 했다고 한다. 이후 신씨가 그의 친척집에 잠깐 머물렀던 탓에 친척과 연락이 닿게 되었는데 그 친척의 말에 따르면 나오자마자 오갈 데도 없었고 자신의 집에서 체류하다가 서울로 올라갔으며 [[서울역]]에서 [[노숙자]]로 전전하다 쪽방(추정)에서 술 먹다가 사망한 것 같다며 그의 사망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심지어 친척의 말에 따르면 그가 찾고자 하는 마지막으로 의지하려 했었던 딸조차도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 김삼식†[*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박영민'이라는 이름으로 가명 처리되었다.] - 앞서 나왔던 48일간 독방에 수감되었던 사람이다. 집안에 재산이 많았는데 그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그가 재산 상속을 많이 받게 되자 큰 누나가 주도해서 그를 수심원에 넣었다. 방송에 나오고 탈출했음에도 가족들이 찾지 않았으며 자신을 집어넣은 누나에 대해 큰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흔적이 발견된 곳은 역시나 교회 쉼터. 출소 직후 갈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강도단에 가담하고 그 강도단에서 망을 보는 위치로 있었다가[* 그 강도들은 내분이 일어났는지 다른 강도단원들이 한 단원을 죽였다고도 한다.] 검거되어서 7년간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 교회 쉼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목사를 만나 감회되어 어느 정도는 살 수 있었지만 수심원에서 당한 폭행으로 인한 PTSD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로 계속 살았던 것과 누나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제초제를 먹고 자살했다. 3일을 버텼는데 죽어가면서 누나와 화해하고 용서했다고. * 김모씨† - 그의 형이 죽었다고, 죽은 지 한참 되었다고 증언했다. * 이모씨† - 여성. 수용 이전만 해도 한 남성과 결혼을 앞둔 상태였는데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그녀의 다른 자매들이 이런저런 빌미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남편(당시 仮)은 수용당한 이씨를 꺼내려고 했으나 보호자가 아니면 꺼낼 수도 없다는 조항이 있었던 데다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상태라서 발만 동동 굴렀다고 한다. 그나마 탈출한 뒤에는 계속 동거했지만 정식 혼인신고는 그녀가 사망하기 1년 전에야 뒤늦게 했다고 한다. 사망 시기는 2015년 8월이다. 이 외에도 인명장부를 토대로 관련 관공서 등에 연락해 보니까 사망 사실이 접수되었거나 전산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생사 여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취재팀이 발굴한 문서의 406명 중 1997년 기준으로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청년 수용자 75명의 탈출 조치 후 행방을 찾았지만 그 중 사망자가 16명, 행방불명이 27명으로 집계되면서 그 당시의 젊은이들 중 '''절반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은 몇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상술했듯이 충청도의 여러 관련시설(정신질환자 복지시설, 요양원, 노인요양병원 등)에 분산 인계되어서 시설에 장기 수용되었다. 물론 유부도와 비교하면 훨씬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는 점이 다행이지만 문제는 장애나 PTSD 증상이 어느 정도 나아져 사회에 돌아가려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보여도 형제/자매/자식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포기각서까지 쓰면서 요양원에 맡겨 버린 뒤 나 몰라라 하며 아예 찾아오지도 않고 심지어 이와 관련해 전화하면 왜 전화했느냐고 면박을 주는 등등 여전히 무시해서 시설 안에서만 계속 머물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참하게 죽은 이들보다는 그나마 나으나 이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 김모씨(62) - 2016년 방영분 초반에 나온 할머니다. 이에 대해서는 상술했다. 당시 풀려난 후 다른 22명과 함께 특정한 요양원에 입소했는데 그 중 5명이 퇴원하였고 12명은 요양원 생활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 강모씨(2016년 취재 당시 62세) - 거의 수심원 초창기부터 20여 년이 넘게 수용되었고 인계 이후 요양원에서도 20년 넘게 살게 되었다. 그렇게 사회에서 격리되는 동안 그는 노인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 퇴원시켜 달라고 어머니에게 면회를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여담이지만 위의 원장이라는 작자와 비슷한 연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